그냥 내버려 두세요
초롱이네도서관 관장 오혜자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열리는 판타지의 문, 그 너머의 세계는 저에게도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바깥세상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는 제 목숨 값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쪽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열려있어 누구나 넘나들 수 있지만 나오고 싶지 않은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매력적인 것은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작은도서관의 구석 한 켠이면 충분했습니다. 일터이자 충전소인 이만한 공간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음, 나이가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맞춰 살려면 힘을 써야 하는데 같은 밥 먹고도 기운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책을 자주 들고 옮겨서 그렇겠지만 새끼손가락 관절이 아픈지 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어스시의 마법사』로 널리 알려진 르 귄의 에세이입니다. 2018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후로도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80세가 되어서 이런 작업도 재밌겠다며 쓰기 시작했다는데 2015년 7월자의 글까지 실려있습니다. 이 책은 코로나로 발이 묶여 꽃밭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던 때에 만났습니다. 프로필 사진 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했는데,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이라는 부제를 달아 풀어낸 문장에 냉큼 마음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분명 노인의 글인데 문장이 칼칼합니다. 꼬장꼬장합니다. 누군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니들이 노인을 알아?’라며 쏘아붙일 태세입니다.
스무 살도 마흔 살도 몇 밤 자면 찾아오는 시절을 어떻게 잘 넘겼나 싶었는데, 노인의 시절은 좀 어렵습니다. 상실의 시간이라고 여겨져 조금씩 우울해지고 있었습니다. 르 귄은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는 긍정적 사고 힘에 대한 메시지에 대해, 그렇게 애쓰다가는 ‘십중팔구 끔찍한 멍청이가 된다’며 어깃장을 놓습니다. ‘노년은 나약한 자의 것이 아니다’라며 마라톤을 완주하고 역기를 드는 탄탄한 몸을 과시하는 광고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습니다. 100프로 동감입니다.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르 귄은 ‘노년은 건강하고, 용감하고, 휠체어에 앉아 살아가는 사람들,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라고 합니다. 관절염에 걸린 손과 굽은 등, 연륜의 두께가 쌓인 얼굴이 노년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노년을 타깃으로 하는 광고의 문구는 ‘노년은 젊은이들의 것이 아니다’가 좋겠다고 합니다.
에너지파워가 최상급인 펜력을 가진 여성 작가가 들려주는 먼저 살아본 이야기는 확실히 힘이 느껴집니다. 예리한 언어와 문장들은 단숨에 혼돈을 정리해 주곤 하니까요. 뒷배가 든든합니다.
아직 완전히 늙지 않은 사람들은
노년이 저절로 스러지지 않도록 노력해 주세요
나이를 먹으면 먹는 대로 두었으면 합니다
나이 든 친척이나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존재의 부정은 아무짝에도, 누구에게도, 어떤 소용에도 쓸모가 없어요
존재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예전처럼 용기백배하지는 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보는 눈은 좀 더 밝아졌고, 돌발 상황에 몸이 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은 온전히 제 것이겠지요. 경애하는 작가의 촌철살인 문장을 방패 삼아 갑자기 용감해져 봅니다.
“제가 나이를 먹는 일에 관심 두지 말고 하던 일 그냥 하세요!”
#번아웃 #소진 #그냥아웃
'번아웃이 올 때, 나는 읽는다'의 주제로 함께 읽기를 권함
- 오혜자님의 추천 책
(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박경리 시, 마로니에북스, 2008
(중) 『사는게 뭐라고』 사노요코 글, 마음산책, 2015
(우) 『어스시의 마법사』 (전6권) 어슐러 K. 르 귄 글, 황금가지 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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