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주는 맛
일산도서관 관장
박 미 숙
그 녀석이 ‘그림’을 그린단다. 피식, 웃었다. 가위로 동그라미도 제대로 못 오리는 감각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그럴 시간 있으면, 음악이나 해라. 음악가로 살고 싶다고 그리 바둥거리더니 기타 한 번 잡는 꼴을 못 봤다.’ 생각은 이랬지만, 그러라고 했다. 뭐 나에게 허락을 받을 나이도 아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 동의를 얻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림책 작가님 소개로 알게 된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단다. 첫날, 이런 걸 하는 게 사치가 아니냐는 둥 자기가 이렇게 살아도 되냐는 둥 머뭇거리던 그 녀석은 그림을 그리러 떠났다. ‘며칠 가겠나?’ 생각하고 나는 재봉틀에 앉았다. 바지를 하나 만들 생각이다. 유튜브를 몇 개 훑어 봤는데, 어찌어찌하면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공짜로 얻은 천이 있으니 실패하든 말든 해보기로 했다. 뭔가에 이리 집중한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도서관 사무실에서 숫자 확인하고 결재 버튼 누르고, 뭔가 사업 계획서를 쓸 때 빼곤 그 ‘집중’이라는 걸 할 틈이 없었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꼬박 다섯 시간을 들여 바지 하나를 만들었다. 신기하고 재미났다. 놀랍고 신기했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화실로 녀석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소개해준 그림책 작가님과 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늦었다. 겨우 시간을 맞춰 나갔는데, 아직 그림이 안 끝났다고 화실로 들어오란다. 뻘쭘하지만, 두 작가가 운영한다는 공간이 궁금하기도 해서 슬쩍 문을 열었다. 허걱. 녀석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잘 그렸다. 세 시간 넘게 앉아서 그림만 그렸다는 녀석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그 뒤로 녀석은 화실을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자화상을 세 장이나 그려오고, 생전 안 보던 화집 같은 걸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람들 얼굴을 관찰하고, 웃을 때 어떤 근육을 쓰는지 연구를 한다나 뭐라나.
녀석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노래 한 곡 불러주는 일 없고, 어쩌다 노래를 만들라치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했다. 내가 물었다. “너, 음악 하고 싶은 거 맞니?” 그럴 때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안 하냐?’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도 그러니까. 나도 날마다 ‘글 쓰고 읽는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하지만 안 그러니까. 안 읽고 안 쓰면서 하고 싶다고 하니까.
녀석은 그 화실 ‘취미 반’을 다니고 있다. 화실에 가면 선생님들이 묻는단다. ‘뭘 그리고 싶냐?’고. 무엇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그걸 그리라고 한단다. 그리고 가끔 들여다보면서 몇 마디를 거들 뿐이란다. 가끔 이런저런 의견을 주는 일도 있는데, 그건 주로 어떤 걸 궁금해할 때뿐이라고. 취미반의 특징이라 한다. 하고 싶은 걸 하게 하는 것.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 ‘취미’라는 게 그런 거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그걸 직업으로 삼을 것도 아니고, 수지타산을 맞춰가며 돈을 벌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내 돈을 들이고 내 시간을 내어하는 일. 그게 ‘취미’라는 거였다.
음악을 하는 것도 좋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건 결과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내가 아무렇게나 하고 내가 만족하면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 보여야 하고, 그들의 평가에 대해 감내해야 할 게 많다. 결국 우리에게 ‘취미’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양념 같은 것이다. 본 재료가 있어야 음식을 만들 수 있겠지만, 양념이 없으면 어떤 요리인들 맛이 나겠는가? 그러니 부러 돈을 들여 좋은 양념을 사고, 음식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거나, 문득 맵고 달달한 걸 먹고 싶을 때 팍팍 쳐야 먹을 맛이 날 게다.
그러니 지금 지갑을 털어 ‘취미’에 들일 뭔가를 사고 있는 자신을 탓하지 말아라. 할 일이 가득한데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을 탓하지도 말아라. 그걸 해야 할 일도 되는 거다. 무엇보다 취미가 없다 싶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 바란다. 취미가 없어도 재미있다면 할 말 없지만, 그럴 리 만무하다. 지금부터 뭐라도 하나 하자. 안 그러면 죽어라 일만 하다 죽어야 하는 내 삶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나도 얼른 글을 마치고, 지난 월급날 사놓은 천들을 꺼내야겠다. 이번에는 블라우스를 하나 만들 생각이다. 단추도 두어 개 달고 말이다.
[박미숙님의 추천 책]
1. 나는 [ ] 배웁니다 / 가브리엘레 레바글리아티 / 책속물고기
2. 손으로, 생각하기 / 매튜 B. 크로포드 / 사이
3. 취미 있는 인생 / 마루야마 겐지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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