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도서관, 문학을 읽다
다시, 봄
김양재(작은도서관 웃는책, 온라인 고전세미나 회원)
봄. 온 세상이 봄이에요. 나 좀 보라고, 어서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고개 돌려 바라보라고 ‘봄’인 걸까요. 동네 산책길에 어슴푸레 연둣빛이 도는가 싶더니, 매화!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목련!…… 느낌표 사이사이 띄어 쓸 겨를도 주지 않고, 팡! 온 세상이 연분홍 벚꽃의 물결로 넘실거려요. 바람결에 꽃잎이 흔들리면, 사람의 마음도 누군가를 향해 손짓하게 되는 걸까요. 시린 겨울을 견뎌낸 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우리 얼굴 좀 보자고 말을 건네와요.
얼마 전, 예전에 가까이 살았던 친구들을 만났어요. 어머, 야야! 어쩜 넌 똑같다. 똑같긴 뭐가 똑같냐, 나만 늙었다. 4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호들갑을 떨며 반가움을 나누다, 한 명씩 그간의 소식들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다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본인과 배우자의 건강 문제, 연로하신 부모님 돌봄의 어려움, 내 맘 같지 않은 아이, 불안한 앞날 걱정이 끊이질 않았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데, 한 친구가 버럭 말을 끊었어요. “아니, 어떻게 좋은 얘기가 하나도 없어!”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만난 지 1시간이 넘도록 ‘누가 누가 더 힘든가’ 배틀같은 대화였더라고요. “그래, 그래. 우리 이제 좋은 이야기 좀 하자.” 누군가 웃으며 급히 정리했지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어요.
집에 돌아오던 길, 문득 올리브 할머니가 떠올랐어요. 그분이라면, 우리의 ‘좋지 않은 이야기’ 앞에서 뭐라 하셨을까? 생각했어요.


올리브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올리브 키터리지』예요. 2009년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소설이죠. 미국 메인주 크로스비라는 가상의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로 펼쳐져요. 그 작품에서 시작된 ‘올리브 키터리지 월드’는 20여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다시, 올리브』, 『이야기를 들려줘요』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어요. 올리브는 일반적으로 ‘할머니’라는 단어가 떠올리게 하는 푸근하고 너그러운 할머니와는 거리가 있어요.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으로, 타인에 대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솔직한 매력이 있지만, 그렇기에 까칠하고 퉁명스럽고 자기만 아는 제멋대로처럼 보이기도 해요. 좋게 말해 ‘관심’, 노골적으로 말하면 ‘오지랖’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도, 누군가에겐 ‘망할 년’이라는 욕을 먹기도 하는, ‘너무나 올리브’인 올리브.
맙소사, 올리브, 당신은 정말 까다로운 여자예요. 더럽게 까다로운 여자. 젠장, 그러니 괜찮으면 올리브, 나하고 있을 땐 조금만 덜 올리브가 되면 좋겠어요. 그게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땐 조금 더 올리브가 된다는 걸 의미하더라도.- <시인>, 『다시, 올리브』

올리브와 깊고, 얕게 얽히고설킨 인물들 모두는 저마다의 고통 속에 있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관계, 빈둥지증후군, 배우자와의 돌이킬 수 어긋남, 뒤늦게 깨달은 부모의 끔찍한 모습, 사별한 이들에 대한 그리움, 자식을 향한 배신감, 죽음을 앞두고 주변인들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두려움, 자신의 치부와 직면한 후의 고통, 노년의 고립감.......<종합 선물 세트- 삶의 고통편>이라 할만한 이야기가 쉬지 않고 이어지죠.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요. 사람들은 살고, 희망을 품고, 심지어 사랑을 보듬지만, 여전히 고통을 겪어요. 모두 마찬가지예요.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제4권, 『이야기를 들려줘요』
하지만 고통의 이야기들은 삶을 향하고 있어요. 온갖 고통과 함께 하는 ‘삶’….
그러고 보면 친구들이 풀어놓았던 ‘좋은 이야기 하나 없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이에요.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아들, 신경질적이라 말도 하기 싫은 딸, 각방이 당연한 부부 사이, 얄미운 시동생, 효심과 죄책감을 오가는 부모님에 대한 심정들은, ‘올리브 키터리지 월드’ 안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와 책을 내려놓던, 저절로 고이는 눈물에 눈을 꾹 감던, 누군가의 한 마디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던 순간들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너만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안에도 있는 이야기. 아프고 서럽고 부끄러운 감정들...그 모두가 우리의 삶인 것 같아요. 그러므로 내 삶 속 고통을 말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내보는 일, 아무도 잡아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손을 떨리는 마음으로 내밀어 보는 일, 고통에 짓눌려 가라앉지 않고 다시 한번 삶을 향해 떠오르는 애씀. 그런 것들이 고통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삶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오, 미친, 이 우스운, 알 수 없는 세상이여! 보라. 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 하는지. - <밀물>,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와 『이야기를 들려줘요』 속 노년의 올리브는 여전히 ‘올리브다운 올리브’지만 “음, 말해봐. 듣고 싶구나.”, “이야기를 들려줘요.”란 말을 하는 인물이 되어가요.
“네 삶은 어떠니, 베티?”, “제 삶요? 오, 아시잖아요. 형편없죠”
“음, 그건 네 삶이야. 중요한 거라고.”
“난 이렇게 생각해, 이 사람아. 넌 아주 잘하고 있어.” -<심장>, 『다시, 올리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자신에게 손을 뻗어도 된다고 먼저 말해주는 사람. 올리브는 타인을 향해 먼저 손을 번쩍 들어보이는 사람이에요. 타인의 고통과 삶의 경이 속을 헤엄칠 용기 있는 존재이기에 여전히 다른 이들과 같은 바다 속에 머물 수 있어요. 노년에 만난 또 다른 사랑, 평생 지녀본 적 없던 진실한 우정의 발견…. 다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노년의 삶에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올리브키터리지 월드’의 이야기들은 오늘의 내게 속삭여줘요.
오늘도 솜이와 산책을 했어요. 도도도도 가볍게 걷는 솜이를 따라 걸으면 1시간 정도가 걸리는, 동네를 감싸며 한 바퀴를 돌게 되는 길이에요. 집까지 5분 정도 남았을 때, 발길을 멈추게 하는 나무가 있어요. 주변 나무들에 비해 눈에 띄게 가늘고 중간 높이부터는 한쪽으로 크게 휘어 곧 쓰러질 듯 조마조마한 벚나무. 바닥부터 중간 높이까지 속은 텅 비어 껍질만으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지만, 그마저 길쭉한 사람의 손바닥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 기둥 너머가 그대로 보여요. 사람으로 치면, 갖은 병마에 시달리느라 관절이 뒤틀리고, 몸의 이곳 저곳이 괴사되어, 더 이상 손쓸 수 없이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는 안쓰러운 노인 같아요. 겨우내 죽은 듯 서 있던 그 나무가 올해도 꽃을 피웠어요. 다른 벚나무보다 나흘 정도 늦었지만, 가느다란 가지 끝에 꽃망울이 달리더니 결국 꽃이 활짝 피었어요. 기다리던 이의 애간장을 태우며 피었다 해서, 꽃송이가 유난히 더 곱지도 않아요. 그냥 딱 그 나무를 닮은 자그마한 꽃들이 숱 없는 머리에 이리저리 묶인 리본처럼 달려있어요. 그게 참 대견해요. 너는 참 너답다. 나무 아래에 서서 고개를 한껏 젖히고 감탄하다 길쭉한 구멍을 카메라 렌즈 삼아, 지나치는 사람들을 한 명씩 담아 바라보았어요. 거친 비바람과 벌레의 공격과 인간의 관리 잘못에 의한 감염, 결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채로도 새 꽃을 피워내는 나무... 비어버린 몸 안에 바람과 세상 풍경을 안고 오늘도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갈 뿐인 나무...
음...이게 바로 우아한 삶이네요.
다시, 봄이 왔어요.
우리의 할 일은-어쩌면 우리의 의무일 수도 있고요- 신비의 무게를 가능한 한 우아하게 견디는 것이다. <도움>, 『다시, 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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