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딱 좋은 나인데
책 읽기 딱 좋은 나인데
책읽는사회문화재단/북스타트코리아 이사 이경근
50을 넘기면서 책 읽는 빈도가 줄 더니 코로나 기간 동안은 거의 ‘무독증’에 빠졌다. 어떤 책을 읽어도 전에 다른 책에서 본 것 같은 게 다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았다. 책을 읽을 때 발견하던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는 더 이상 없었다. 게다가 독서 때문에 얻게 된 목 디스크, 노화로 오는 시력과 집중력의 저하 등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육체가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실은 책을 읽지 않고 지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신은 맑고 기분은 개운했다. 하지만 개운한 느낌은 오래 가지 못하고 허전함으로 이어졌다. 개운함과 허전함은 다른 느낌의 같은 단어다. 책을 읽지 않으니까 생각할 거리도 없고 생각 거리가 없으니까 할 얘기도 없어졌다. 새로운 생각이 없으니까 새로운 말이 없어서 예전에 했던 말을 무한반복하거나 '내 말'은 없고 뉴스나 영상에서 들은 말을 복제할 뿐이었다. 나 같은 시니어 세대를 위해 '시니어 북스타트'를 해야겠다고 작심하고, 우리 세대는 긴 글을 읽기 어려우니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연히.
막연해서 생각이 정리가 안 될 때는 사무실을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강의실 책장 정리를 하다가, '이런 책도 있었네' 하며 손이 간 책, 《그해 가을》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목이 막혀서 아예 시원하게 울어버렸다. 강의실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갱년기라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아니다, 코로나 우울증이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부끄럽고 미안했다. ‘창섭’이가 너무 불쌍해서 울었고, 이 정도 어른밖에 못된 것에 대해 어릴 적 나한테 미안해서 울었다. 작가들도 그랬을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이렇게 쓰게 되고 이렇게 그리게 되는 건가? 글도 그림도 너무 솔직해서 슬펐다. 슬퍼서 아름다웠다.
(온라인 서점에 공개된 장면 중에서)
예배당 문간방에서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젊은 권정생과 지체 장애와 지적 장애를 가진 열여섯 살 창섭이, 그리고 교회에 오는 동네 사람들 이야기다.
아마 내가 최근에 ‘시니어 북스타트’를 기획 중이라서 이런 제목(‘책 읽기 딱 좋은 나인데’)의 원고를 청탁 받은 것이리라. 시니어를 위한 독서운동은 그림책으로 시작하자는 데 운영위원 모두 쉽게 동의했다. 누구나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시니어를 위한 그림책 목록’을 만들었다. 목록 중에 《관리의 죽음》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온라인 서점에 공개된 장면 중에서)
안톤 체호프의 작품은 몇 번 읽어봤지만 큰 감흥이 없었는데 그림책으로 만나니 느낌이 달랐다. 내가 진짜 놀란 것은 고정순 작가의 그림이었다. 이런 미완성인 것 같은 그림이 책으로 출판이 됐다고? 연습장에 대충 그린 것 같은, 틀린 그림 위에 다시 그린 것 같은, 밑그림을 그린 연필 자국도 있고, 화이트로 지운 자국도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애들이 낙서한 것 같은, ‘올바르지 않은 그림’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그림이 불안해질수록 주인공의 표정은 점점 더 소심해졌고 표정이 소심해질수록 그림은 더 불안해졌다. 소심하다는 건 이런 느낌이라고 공개적으로 외치는 대범함이 후련했다. 대범한 척하며 살아야 해서 불안했던 내 소심함도 해방됐다. 쉬워 보이는데 느낌 있는 그림. 몇 장면을 따라 그려 보았다. 필요할 때나 가끔 ‘졸라맨’ 정도를 그리며 살던 나 같은 사람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게 만드는 이런 그림이 나는 좋다.
“첫 산문집을 준비하면서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자꾸만 내 안에 정지 버튼에 손이 가던 그해 겨울, 자살 충동 억제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고 상담 치료에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 출판사를 시작하는 친구에게 더미를 보냈다. ...친구에게 개업 선물로 그림책 더미를 보내면서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친구에게 계속 쓰러지는 ‘나’를 보여 준 심술에 대해 사과하고 싶지만, 마음이 태평양 같은 친구라 그냥 넘어간다.”(72쪽)
요즘은 뭔가 잘 안 풀리는 사람들 이야기에 끌린다. ‘잘 되지도 않는데 왜 계속 하지?’ 하는 호기심도 들고, ‘못하는데’(진짜 못하는 건지 세상이 못 알아보는 건지는 모를 일이다.) 좋아서 그만두지 못 하고 계속 하는 사람들이 짠하면서도 멋있다. 내가 하는 일도, 못하는데 재미있어서 아등바등 계속 해온 게 18년째다. 그렇게 50 중반이 되고 보니 앞으로도 엄청 잘하게 될 리는 없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계속 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누군가는 아픈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또 누군가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를 그리며 문장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한 줄이라도 정성껏 쓰고 그리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예술이다.”(142쪽)
수제 그림책 하나를 시작했다.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 얘기다. 이어서 어머니 얘기도 내 얘기도 그리고 싶다. 첫 장을 그렸는데 역시 엉망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화이트나 아크릴로 덧칠을 좀 하든지 뭔 수가 있겠지. 상처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형식으로 재현해보며 덧대서 아물리는 것이지.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고정순 작가가 힘을 내면 좋겠다.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고 책이 많이 팔려서 돈도 많이 벌면 좋겠다. 파이팅.
나이가 들수록 동심을 조금씩 회복하는 것 같다. 한창일 때는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 ‘이 책 재미있어’라고 하면 재미없어도 티를 내기가 난처했다. 어린이는 ‘이 책 재미있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본인이 읽어보고 재미있어야 재미있다는 걸 안다. 믿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다. 나이가 드니 비슷한 현상이 생긴다. 나한테 재미없으면 누가 뭐래도 재미없는 책이다. 이제 나는 예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재미있는 책을 알아볼 수 있다. 책 읽기 딱 좋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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