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책을 읽다
결핍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이동진
저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학교 도서관을 맡고 있습니다. 겨울방학이 되면 다음 학년도에 학생들과 읽을 책을 고르는 시간을 갖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것을 ‘발굴’이라고 하는데 이 일이 참 즐겁습니다. 이 책을 학생들이 잘 읽을까? 이 책으로 어떻게 수업하는 게 좋을까? 다른 선생님들은 어떤 책으로 수업을 하셨지? 같은 질문들과 함께 즐거운 상상을 하며 다음 학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올해 제가 학생들과 읽으려고 챙겨둔 목록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청소년 여러분들, 그리고 청소년들과 함께 책 읽기를 고민하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올해 문학 시간에 시집 읽기를 합니다. 몇 년전부터 시에 동그라미, 세모, 밑줄을 긋게 하고, 갈래, 성격, 특징, 주제를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수업에 조금 염증을 느꼈습니다. 시집 한 권을 온전히 읽고, 한 편의 시가 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을 학창시절에 경험해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리고 청소년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다독여주는 시집을 학생들과 읽고 싶었습니다. 좋은 시집들이 정말 많았는데 올해 제가 선택한 시집은 오은 시인의 ‘마음의 일(창비교육)’입니다. 오은 시인은 활발한 활동으로 대중들에게 굉장히 친숙한 분이신데, 평소에 청소년들이 삼킨 말들, 예를들어 ‘아파요’, ‘힘들어요’, ‘모르겠어요’같은 말들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을 천천히 읽어보면 내가 말할 줄 몰라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들을 여럿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발견의 순간은 곧 위로였습니다. 3월 초에 학생들과 같이 읽어봤는데 좋았다고 하는 시가 너무 다양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꼭 맞는 시 한 편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이 시집은 기획이 참 재미있습니다. 시집과 더불어 시툰도 함께 출간했습니다. 시툰은 독자가 시를 좀더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웹툰 형식으로 풀어낸 것인데 시 읽기를 처음 시작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아주 좋습니다. 오은 시인의 친구이신 재수 작가님께서 그림을 맡아 주셨는데 굵은 연필 선들과 작가님의 위트 있는 표현들이 우리 마음을 증폭시켜 줍니다. 특히 차례보다 먼저 등장하는 에필로그는 굉장히 압도적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툰을 말씀드리니까 또 생각나는 좋은 책이 있어서 덧붙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툰인데요 ‘마음 시툰 : 너무 애쓰지 말고(창비)’입니다. 박성우 시인님이 시를 고르셨고 앵두작가님이 그림과 글을 맡으셨습니다. 여전히 꿈을 고민하는 어른과 고등학생의 성장 이야기입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 읽었는데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 교과서에서 딱딱하게 배웠던 시들이 내 삶에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소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겨울방학 동안 최진영 작가의 ‘일요일’이라는 단편 소설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일주일(자음과 모음)’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진영 작가는 올해 ‘홈 스위트 홈’으로 2023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신, 현재의 한국 문단을 힘있게 이끌고 계신 분입니다. 청소년 문학을 작품 활동의 중심에 두는 분은 아니지만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책은 기획의도부터 청소년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세 편의 짧은 소설에는 서로 다른 입장과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 편이 독립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깊이 연결됩니다. 그 복잡한 연결을 가만히 응시하면 ‘우리 조금만 더 친해지자고.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고(작가의 말 중에서)’ 호소하는 작가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님은 스스로 ‘청소년을 모르고, 주변에 청소년도 없다. 그래도 글을 쓰는 동안은 오직 소설 속 인물만을 생각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은 나를 깊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작가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고,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좋은 어른을 만날 수가 있을 겁니다.
두 번째 추천 소설은 ‘국립존엄보장센터(서해문집)’입니다. 이 책은 독서교육을 열심히 하시는 전국의 국어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SF 단편 소설들을 묶은 것입니다. 총 다섯 편의 재미있는 소설이 실려있고 SF소설의 의미에 대해 토론한 선생님들의 대담도 마지막에 있습니다.
바야흐로 SF의 시대입니다. 영화, 웹툰, 애니메이션, 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우리는 미래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상이 구체적일수록 그것은 실재감과 이어지는데 눈 앞에 그려지고 만져지는 미래의 모습이 장미빛만은 아닙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환경오염, 팬데믹, 장애, 경제적 불평등, 노동, 돌봄, 노화의 문제들은 더 심각한 새로운 갈등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예측하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런 소설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해서 철학하는 힘을 키워야만 합니다. 이 책은 친구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눠보기를 추천합니다. 어쩌면 이런 시도들이 미래에 맞닥뜨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비문학도 한 권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가 도서관을 맡고 있다보니 최근 자신의 진로와 관련한 책을 찾는 학생들을 많이 봅니다. 선생님들께서도 진로독서를 굉장히 강조하고 계십니다. 독서로 진로를 탐색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학생들의 모습은 조금 아쉽습니다. 책 선택의 기준이 좋은 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오로지 ‘전공적합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진로와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책은 너무 쉽게 선택에서 배제됩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좋은 전공적합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직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일을 하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하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도와야만 합니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을 잘 알아야만 자신의 일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좋은 전공적합성은 다른 사람을 잘 아는 것, 곧 ‘세상’을 잘 알아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좋은 진로 공부는 세상 공부여야만 합니다. 도서관에서 진로 도서를 추천해 달라는 학생이 있으면 이 얘기를 해 줍니다. 그리고 ‘땀흘리는 글(창비)’을 서가에서 꺼내 줍니다.
이 책에는 각자의 직업 세계에서 땀흘리며 분투하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짧은 글로 실려 있습니다. 특정 직업 세계를 미화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노동의 고달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노동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여러가지 이유로 힘들고 고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럴 때는 뜬구름 같은 “힘내”, “잘될 거야”같은 위로보다 나랑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한 사람의 공감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책은 그런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진짜 필요한 전공적합성을 갖추게 해 주는 책입니다. 비슷한 기획을 문학으로 풀어낸 ‘땀흘리는 소설(창비)’, ‘땀흘리는 시(창비)’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마지막은 추천을 끝까지 고민했는데 최근 우리학교 도서관을 보고 용기를 얻어 추천합니다. 요즘 우리 도서관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립니다. 특히 만화책이 있는 코너가 그러합니다. 슬램덩크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봉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슬램덩크 더 퍼스트’를 많은 학생들이 본 것 같습니다. 영화 이전의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제가 슬램덩크(대원씨아이) 세대입니다. 이번 영화도 극장에서 여섯 번이나 봤습니다. 예전에도 수업 시간에 슬램덩크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좋은 영화의 힘은 대단합니다. 덕분에 학생들과 오랜만에 세대차이 없이 즐겁게 대화하고 있습니다. 영화 ‘슬램덩크 더 퍼스트’는 철저하게 만화책을 다 본 사람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그렇지 않고 영화만 보면 놓치게 되는 명장면이 정말 많습니다. 제 세대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인생책으로 꼽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모든 캐릭터들의 감동적인 성장 스토리가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쪼록 영화를 계기로 많은 청소년들이 이 좋은 만화책을 많이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추천글을 마무리하며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추천하고 싶은 모든 책들이 조금씩 결핍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오직 문학만이 결핍이 아름답다고 했다.(조해진) AXT 2023. 03/04.’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뒤 결핍을 바라보는 마음에 대해서 가끔 생각합니다. 결핍은 반드시 소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과연 모든 결핍이 사라진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을까요?
결핍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청소년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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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청소년, 책을 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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